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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킨리 원정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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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현숙 작성 2,955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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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킨리 원정에 함께 갔던 일중 산악회 이현숙입니다.

제가 쓴 기행문 올려 봅니다.

개썰매 끌며 개고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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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2010년 5월 21일 ~ 6월 13일

장소 : 미국 알라스카 맥킨리 (6194m)

북미 최고봉이 맥킨리라는 말은 수없이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맥킨리는 한국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고상돈 대장이 맥킨리 등정에 성공한 후 하산 길에 추락하여 숨진 곳이란 무시무시한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무슨 깡으로 여기에 도전장을 던졌는지 이해가 안 간다.

알라스카 데날리 국립공원에 있는 맥킨리는 원주민들이 데날리(태양의 안식처)라 부르며 신성시 하던 봉이다. 데날리를 매킨리라 이름 지은 것은 1897년 윌리엄 딕키라는 사람이다. 그는 맥킨리 빙하에 처음 접근한 사람인데 당시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맥킨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맥킨리는 북위 63도 4분 15초에 있으며 북극점에서 322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여름에도 영하 20℃ 이하로 떨어지고 바람이 강하며 무포터, 무셀파의 조건하에 모든 대원이 짐을 지고 가야하는 곳이다.

두 번 뜨는 해 ( 5월 21일: 1일차 )

기아팀 8명, 경기 산악연맹 7명, 일중산악회 4명, 말레이시아에서 온 산악가이드 두 명, 이렇게 21명이 1인당 46kg의 무지막지한 짐을 부치고 12시 35분 비행기로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타이완의 타이페이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알라스카로 향했다. 계속 동쪽으로 날아가 날짜 변경선을 넘으니 하루가 41시간으로 늘어났다. 인천서는 한 낮에 출발했는데 비행기 앞 쪽이 밝아오며 다시 해가 떠오른다. 12시간의 비행 끝에 앵커리지에 도착하니 같은 날 오전 9시 밖에 안 됐다. 시간을 거슬렀으니 타임머신을 타고 온 셈이다.

앵커리지 공항은 시골의 작은 읍처럼 공항이 협소하고 작다. 입국 심사를 하는 데도 창구가 적어서 그런지 한 없이 오래 걸린다. 미국인을 우선으로 해준다. 우리는 어차피 사람이 많아 늦으니 꼴찌로 나가자고 공항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앉아 느긋하게 기다리는데 한 직원이 와서 한 그룹이냐고 묻더니 먼저 해 주겠단다.

어마어마한 짐을 끌고 나오니 이동훈 가이드가 우리를 맞이한다. 그는 미국이름이 락키라고 했다. 몽골리안 바비큐로 점심 식사를 한 후 아리아이라는 장비점에 들러 부족한 장비를 구입하고 동양식품이란 한인마트에서 필요한 부식을 준비했다. 아리아이에서 막 맥킨리 등반을 마치고 하산한 한 남자를 만났다. 날씨가 얼마나 춥냐? 설피는 꼭 신어야 되냐? 하고 물으니 어이없다는 듯이 우리를 쳐다본다. 얼굴은 쭈그렁바가지를 해가지고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니 우리를 완전 또라이로 아는 것 같다.

지진 공원과 쵸컬릿 공장을 보고 숙소에 들어와 각자 장비 점검을 하고 21개의 카고백을 늘어놓으니 거실이 꽉 찬다. 연희씨는 그 광경을 보고 우리 카고백이 저기 들어간 것만도 영광이라고 감격한다. 사실 우리 같은 노약자를 누가 원정대에 끼워 주겠냐 말이다. 그저 붙여준 것만도 고마워 감지덕지 할 뿐이다.

아침 고요 수목원 ( 5월 22일: 2일차 )

밤낮으로 밝으니 잘 때는 두꺼운 커텐으로 창문을 가려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 커텐을 올리니 눈이 부셔 눈을 뜰 수가 없다. 눈만 뜨면 썬글라스를 껴야한다. 연희씨와 집 앞의 숲길로 산책을 나갔다. 숲길은 조용하고 지나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조금 가니 늪지가 보이고 철새 조망대도 있다. 자연 그대로 보존된 숲길을 걷자니 아침 고요 수목원이란 생각이 든다.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한 집의 창문에서 꼬마가 손을 흔든다. 우리도 손을 흔들며

“굿모닝?” 하니까 창문을 열고 베란다까지 나와 “하이?” 하고 인사 한다. 길바닥에 인간이라고는 보이지 않으니 사람만 보면 반가운가 보다.

오전에는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오후에는 다람쥐 공원으로 갔다. 다람쥐는 없지만 바다 위에 떠 있는 설산이 기막히다. 뉴질랜드 남섬의 피오르드 사운드와 비슷한데 설산이라 더 멋있다.

또 다시 장비점에 들러 필요한 물건을 샀다. 썰매 끌 비너가 부족하여 비너를 더 사고, 햇빛이 강하다고 해서 코 덮개도 샀다.

C₁설치 : 힘든 날 ( 5월 23일: 3일차 )

8시에 기상하여 경비행기를 타기 위해 탈키트나로 향했다. 앵커리지에서 탈키트나까지는 버스로 3시간 정도 걸린다. 가다가 커다란 아이스크림 모형이 있는 휴게소에 들렀다. 작은 사이즈로 시켰는데도 어찌나 양이 많은지 가슴까지 얼어붙는 것 같다. 휴게소에서 화장실 가려니 여자가 세 명 밖에 없어 널널하니 좋다. 화요반에서 산행할 때는 삼 사십 명이 여자 화장실에 몰려 툭하면 남자 화장실까지 침범하는데 여기서는 그럴 일이 없어 좋다.

탈키트나에 도착해 레인저 사무실에 들러 입산신고를 하고 사전 교육을 받았다. 레인저 사무실에는 일기예보와 산행 통계가 나와 있다. 올 시즌에 23명 등정했고, 등정율은 24%라고 나와 있다. 우리의 인솔자 박혁수 전무님이 1991년 수원 원정대로 왔던 깃발도 벽에 붙어있다. 사망자 명단을 보니 1979년 고상돈과 이일교도 쓰여 있다. 그런데 이일교를 이리교(Lee, Li-Kyo)라고 써 놓았다.

사전교육은 화면으로 보여주는데 한국말로 써 있어 이해가 쉬웠다. 안전에 대한 교육과 쓰레기 처리, 대소변 처리 등에 대한 것이다.

교육 후 대변 통과 비닐 등을 받은 후 경비행기 장으로 이동하여 짐의 무게를 달았다. 파운드로 나와 이해가 잘 안 되지만 1파운드가 450g이니까 대략 반으로 나누면 킬로그램이 된다. 내 짐은 카고백이 55파운드, 배낭이 20파운드 합쳐서 75파운드니까 대략 37킬로그램 정도다.

짐까지 달아놓고 햄버거 집에 가서 햄버거로 점심을 때운 후 경비행기에 올랐다. 날씨가 좋아 설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조종사는 저게 매킨리다, 저게 헌터, 저것은 포레이커봉이라고 친절히 가르쳐준다.

30분 정도 설산 사이 계곡으로 들어가 빙하 위에 내려서니 세상이 온통 눈밭이다. 여기가 2200m고지에 있는 랜딩 포인트다. 짐을 끌어 내린 후 썰매 있는 곳으로 달려가 썰매를 골랐다. 박전무님 말대로 끈이 달려 있고 상태가 좋은 것으로 골라 카고백을 묶었다. 1인당 휘발유 1갤런씩 받아 이것도 썰매에 실었다. 1갤런이 약 3.78리터이니 이것도 3kg은 되겠다.

1인당 65불 씩 주고 설피를 빌렸다. 무거운 삼중화에 설피까지 달고 나니 발 한 짝 들기도 힘들다.

처음에는 내리막길이라 쉬울 줄 알았더니 이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생전 처음 썰매를 끌려니 이게 제멋대로 미끄러져 보통 고역이 아니다. 썰매를 밀고 당기며 6시간의 몸싸움을 벌인 끝에 겨우 C₁(2350m)에 도착하니 온몸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듯 아프다. 내가 제일 꼴찌에서 벌벌 기고 있으니 기아팀의 이준영씨가 마중 나와 내 썰매를 끌어준다. 썰매를 벗으니 몸이 하늘로 붕~ 뜨는 듯하다.

텐트를 치고 안으로 들어가니 내 집에 온 듯 편안하다. 대장님은 오늘 소가 된 것 같다고 하고, 연희씨는 말이 된 것 같다고 한다. 나는 개가 된 기분이다. 알라스카에서는 개가 썰매를 끈다고 들었는데 왜 인간이 끄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개썰매 끄느라고 개고생 한 날이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김영준씨와 오혁씨가 압력밥솥에 밥을 해주어 잘 먹고 끓는 물을 날진통에 담아 침낭 속에 넣고 잠을 청했다.

C₂설치 : 더 힘든 날 ( 5월 24일: 4일차 )

아침에 똥통에 비닐을 넣고 변을 본 후 마개를 잘 막아 연희씨 썰매에 실었다. 가다가 크레바스에 버리라는 것이다. 평지에서는 그런대로 썰매를 끌기가 쉬운데 약간의 경사만 나타나도 썰매가 뒤에서 잡아끄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죽을 맛이다. 한참 가는데 앞에서 연희씨가 기다린다. 왜 안 가느냐고 했더니 크레바스에 똥을 버리려는데 통이 안 열린다는 것이다. 대장님이 열어주자 버리고 또 앞서서 휑하니 달아난다.

호선생님과 연희씨는 걸음이 빨라 금세 시야에서 사라지고 대장님은 내가 낑낑대고 있으니 나를 도와주느라고 둘이 뒤쳐졌다. 남들은 6시간도 안 걸리는 길을 나는 8시간도 더 걸려 겨우 C₂에 도착했다. 이 날은 박전무님이 마중 나와 내 썰매를 끌어주었다. C₂는 2624m 되는 곳에 쳤다.

저녁 식사 후 버프를 오려 귓구멍과 콧구멍, 입 구멍을 뚫어 마스크를 만들었다. 각자 얼굴에 써 보며 코를 더 잘라라, 입을 더 잘라라 하려니 남들이 들으면 엄청 잔인하게 들리겠다.

C₃설치 : 더 더 힘든 날 ( 5월 25일: 5일차 )

아침에 출발할 때는 해가 오른쪽에서 비쳐 내 그림자가 왼쪽으로 생긴다. 몇 시간 걷다보면 그림자가 앞으로 오고 더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마치 내가 해시계가 된 기분이다. 마스크를 하고 걸으려니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햇빛을 받겠다고 이렇게 가리고 다니나 싶다. 나중에 땅 속으로 들어가면 이 햇빛을 받고 싶어 안달을 해도 못 받을 텐데 말이다.

고갯길이 나타나면 고개를 위 아래로 흔들며 기를 쓴다. 소나 말이 힘들 때 왜 고갯짓을 하는지 알겠다. 가다가 평평한 곳이 나타나면 썰매를 멈추고 잠시 쉰다. 쉬고 있는데 참새만한 작은 새가 내 썰매에 날아와 앉는다. 이런 눈밭에서 뭘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 초코파이 부스러기를 뿌려주었는데 잘 먹었나 궁금하다.

가끔씩 파리 시체와 모기, 벌의 시체도 보이는데 이런 곤충들은 뭘 먹겠다고 여기까지 올라왔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혼자 뒤쳐져 오려니 앞에도 뒤에도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고 오직 설산뿐이다. 크레바스에 빠져 저체온증에 걸려 꼬박꼬박 졸다가 죽으면 고통도 없고 편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기서 죽으면 여러 사람 가슴 아프게 할 테니 그것도 안 되겠다.

이 날도 11시간의 사투 끝에 3200m 고지에 있는 C₃에 도착했다. 날이면 날마다 사경을 헤매니 허리와 무릎이 끊어질 듯 아프다.

사서 개고생 ( 5월 26일: 6일차 )

C₃위에 일부 짐을 데포 시키려고 각자 짐을 나누어지고 고갯길을 올랐다. 썰매가 없으니 그래도 좀 숨을 쉴만하다. 그래도 나는 걸음이 느려 다 가지도 못했는데 선두는 짐을 묻고 내려온다. 경기 연맹의 유대장이 내려오며 이미 짐을 눈 속에 묻었으니 내 짐은 그냥 지고 다시 내려가란다.

그래도 대장님을 만날 때까지 계속 걷겠다고 하고 걸어 올라갔다. 고개를 넘어 왼쪽으로 돌아서니 대장님이 보인다. 앞으로 더 오라고 손짓한다. 조금 더 가니 앞에 보이는 것이 매킨리봉이라고 한다. 매킨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가져갔던 건빵은 다시 지고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도 만만치 않아 발가락과 정강이가 아프다. 발이 아래로 쏠려 정강이에 피멍이 들었다. 이거야말로 사서 고생, 아니 사서 개고생이다.

C₄인 매킨리 씨티에 입성하다. ( 5월 27일: 7일차 )

C₃에 설피와 썰매를 놓아두고 아이젠을 찬 후 배낭만 지고 4328m 고지의 매킨리 씨티로 향했다. 연희씨는 배낭 보다는 썰매가 끌기 쉽다고 대장님과 합쳐 하나의 썰매를 끌었다. 둘이서는 호흡이 척척 맞고 속도가 같아 뒤에서 보면 마치 쌍두마차가 가는 듯하다. 착 착 착 착 열 발짝 올라가서는 머리를 땅으로 향하고 쉰다. 나는 썰매도 없으면서 이들보다 느리다. 연희씨가 고소에서 하도 짐을 잘 끌고 가니까 호선생님이 연희씨에게 야크라고 별명을 붙였다.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도 고갯길에서 지체하다보니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온다. 햇빛이 없어지니 북극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가도 가도 텐트는 보이지 않고 기운은 빠질 대로 빠져 탈진 상태가 된다. 텐트도 없고 식량도 없으니 전진이 아니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발을 옮기는데 위에서 대장님이 내려온다. 죽음 직전에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다. 배낭을 넘겨주니 속도가 좀 붙는다. 조금 오다가 뒤돌아보니 대장님이 보이지 않는다. “대장님~ 대장님~ ” 불러도 대답이 없고

“어이~ 어이~ “ 해도 소식이 없다.

내 배낭 지고 오다가 어디 크레바스에 빠진 게 아닌가 겁이 더럭 난다. 만약 크레바스에 빠졌으면 어쩌나? 시체를 들고 한국 가는 거 아닌가? 부반장 얼굴을 어떻게 보나?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마비된 발걸음으로 비몽사몽간에 걷다보니 텐트가 보이고 호선생님이 마중 나온다. 대장님이 안 보인다고 했더니 내려가 보겠다고 한다. 텐트에 도착하니 온 몸이 떨리고 꼼짝을 못하겠다. 아이젠 벗을 힘도 없다. 텐트에 엉덩이만 들여 놓고 침낭을 덮어쓰고 개 떨 듯 떨었다.

호선생님이 와서 아이젠도 벗겨 주고 고아 바지도 벗겨 주었다. 침낭 속에 들어가니 간이 아파 숨 쉬기도 힘들다. 간에 있는 혹이 너무 무리를 하니 더 커졌나보다. 7, 8년 전에 오른쪽 옆구리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가니 지름이 8cm나 되는 거대한 혹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암인 줄 알고 여러 가지 검사를 했는데 다행히 암은 아니라고 했다. 혹이 너무 커서 이걸 떼어내려면 간을 다 잘라내야 하고 그러면 수술 후 상황이 더 나쁘니 그냥 살라고 했다. 숨 쉴 때마다 옆구리가 결리니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낑낑 앓았다.

겨우 물만 마시고 저녁은 먹는 둥 마는 둥, 이도 못 닦고 그냥 잠이 들었다.

데포한 짐 찾아오다. ( 5월 28일: 8일차 )

이 날은 C₃위에 데포해 놓은 짐을 찾으러 내려갔다. 빈 배낭을 지고 내려가니 살만하다. 올라올 때는 애 낳기보다 힘들더니 빈 배낭 지고 내려갈 때는 애 낳은 후 같이 날아갈 듯하다.

내려가다가 대구 등산학교 팀을 만났다. 4명이 왔다고 한다. 이런 곳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니 눈물 나도록 반갑다. 데포한 짐을 지고 다시 메킨리 씨티로 돌아오니 이제야 주위가 제대로 보인다. 어제는 지쳐서 아무 것도 못 보았는데 전망이 기막히다. 설벽을 쌓아 울타리를 만든 사람도 있고 설벽 위에 눈사람을 만든 사람도 있다. 어떤 집은 멋지게 아치형 문도 만들어 놓았다.

남자 소변보는 곳은 막대에 분홍 리본을 묶어 두었는데 곳곳에 너무 많아 눈만 들면 소변보는 남자들이 보인다. 본의 아니게 남자들의 거시기 감상 많이 했다. 대변보는 곳은 합판으로 엉성하게 삼면을 가려 놓았는데 두 곳이 있다. 한 곳은 동양식으로 쭈그려 않게 해 놓았고, 한 곳은 양변기를 갖다 놓아 의자식으로 앉아서 볼 일을 볼 수 있다. 양변기가 편하긴 한데 가끔 오물이 묻어있고 엉덩이가 차가워 나는 주로 쭈그리 화장실을 이용했다. 쭈그리 화장실에서는 남자 소변을 보지 말라고 그림으로 그려 놓고, 볼 일 볼 때 잡으라고 줄도 매 놓았다. 서양 사람들이 쭈그려서 볼일 보기 힘드니 이렇게 해 놓았나보다. 그래도 전망 하나는 기가 막혀 눈 덮인 헌터봉과 포레이커봉을 바라보면서 볼 일 보는 맛은 일품이다. 세상에 이보다 전망 좋은 화장실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고 싶다.

연습 게임 ( 5월 29일: 9일차 )

오전에 박전무님이 간단한 교육을 하고 고상돈이 추락사 한 곳을 알려준다. 젊은 나이에 산화한 그의 일생이 위대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점심 식사 후 텐트 안에서 대장님이 벨트 매는법과 주마링 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연습하러 가는데 기아팀 텐트 앞에서 웬 미국 남자가 호떡을 먹고 있다. 기아팀의 대장이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이게 코리안 팬케이크라고 하니 맛있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다 먹고 손가락까지 쪽 쪽 빨아먹는다. 이 남자는 앵커리지에 산다고 하는데 부인, 사위 두 명, 조카 두 명 이렇게 6명이 왔단다. 자기들은 알파인 가족이라고 자랑한다.

3시에 7시까지 윈드월로 향하는 고개에 올라가 주마링과 하강법을 연습하고 내려왔다. 텐트에 돌아오니 배가 고프다. 호선생님은 랑땅 히말라야에 가서 양 잡아먹은 얘기를 하며 여기는 양은커녕 새도 없다고 한탄한다.

생물은 오직 인간뿐이니 인간을 잡아먹을 수도 없고 인간 중에도 독종만 있으니 맛도 없을 거라고 하여 한 바탕 웃었다.

호선생님이 가져온 전복 말린 것과 사과 말린 것으로 허기를 달래려니 남편을 위해, 또 같이 온 우리를 위해 몇 날 며칠씩 간식을 준비해준 배여사의 성의가 눈물 나게 고맙다. 호선생님 부부는 인심이 후해 무엇이나 푸짐하게 준비한다. 돈도 잘 벌지만 쓰기는 더 잘 쓴다. 자신이 졸업한 광탄 초등학교에 스쿨버스도 사주고 매년 몇 천만 원씩 발전기금도 낸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십 원 한 장 낸 일이 없는데 정말 부끄럽다. 선생이랍시고 평생 주둥이만 놀리며 남들이 농사지은 것만 빼앗아 먹은 내가 기생충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실전實戰 ( 5월 30일: 10일차 )

안전벨트를 매고 비너와 하강기, 주마 등을 줄줄이 달고 데포 시킬 물건을 지고 윈드월로 향했다. 마치 전투에 나가는 병사들 같다.

안자일렌으로 줄줄이 사탕 같이 엮었는데 우리는 제일 앞에 김영준씨, 다음에 내가 서고, 호선생님, 연희씨, 대장님 순으로 다섯 명을 엮었다. 가다가 고상돈씨가 추락사 한 곳을 향해 묵념을 하고 윈드월 고갯길에 붙었다. 처음부터 만만치 않던 경사가 고정 로프 구간에 이르자 수직으로 섰다. 주마링으로 설벽과 빙벽을 오르자니 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하다. 고정 로프는 올라가는 것이 한 줄, 내려가는 것이 한 줄 뿐이다. 나같이 느린 사람이 중간에 있으니 뒤로 한 없이 밀린다. 내가 하도 버버거리고 초죽음이 된 모습으로 오르자 내려오던 외국인이 뜨거운 차를 주며 마시라고 한다.

10여 개의 로프를 오르니 드디어 윈드월 정상이다. 내가 가져가야할 짐을 대장님이 지고가 눈 속에 파묻었다. 다 묻고 나니 소변이 보고 싶다. 몇 시간씩 설벽에 매달려 혼이 나가도록 긴장하여 오르느라 소변 볼 곳도 시간도 없었다. 연희씨와 나는 눈밭에서 남들이 보거나 말거나 엉덩이 까고 소변을 보았다.

내려가려고 하는데 웬 남자들이 응급환자가 있으니 한 시간 쯤 후에 내려오란다. 춥고 바람은 부는데 서서 기다리려니 얼어 죽을 판이다. 그래도 나는 늦을 것을 대비해 우모복을 가져갔는데 연희씨와 대장님은 옷도 안 가져가 개 떨 듯 떤다.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 또 줄줄이 굴비 두름처럼 묶고 내려오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영준씨는 이번이 마지막 줄이라고 계속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

눈이 하도 많이 내려 올라올 때의 길은 보이지 않고 다들 짐작으로 내려오는데 갑자기 눈이 흘러내린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앞서 가던 영준씨가 허리까지 묻혔다. 영준씨는 위의 사람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소리치고 간신히 빠져 나와 하산을 계속한다.

열 피치를 다 내려오자 대장님은 세 명에게 안자일렌 줄을 풀고 가란다. 세 명은 번개 같이 내려가고 대장님과 나만 둘이서 줄을 묶고 천천히 내려왔다. 대장님은 얼어 죽겠다고 빨리 가자고 하는데 나는 무릎 아프고 발이 아파 속도를 낼 수가 없다. 나만 두고 가라고 하고 싶지만 대장님이 그럴 분이 아니라 그저 대장님에게 개 끌려가듯 다리를 질질 끌며 내려왔다.

열 세 시간이나 걸려 다 내려오니 사방이 어두워진다. 호선생님과 연희씨는 밥도 안 먹고 기다린다. 다 식은 밥에 국을 부어 녹인 후 한 술씩 뜨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대책회의 ( 5월 31일: 11일차 )

하루 종일 텐트에서 조잘 조잘 수다만 떨었다. 날씨가 나빠 어찌할까 대책회의를 해보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다. 레인저 사무실에서는 매일 일기상황을 화이트보드에 써서 걸어 놓는다.

오늘 낮, 오늘 밤, 내일, 모레 날씨를 적어 놓는데

HIGH @ 17K +15°F라고 쓴 것은 17킬로 피트에서의 최고온도가 화씨 15도라는 소리다. @는 at를 나타내는 기호다. 17킬로 피트는 1킬로가 1000이니까 17000피트, 1피트는 약 30cm 니까 0.3m를 곱하면 17000×0.3=5100m 가 된다. 화씨를 섭씨로 고치려면 C=(F-32)×5/9 즉 (15-32)×5/9는 약 -9.4℃가 된다.

WINDS SE 10~20 MPH는 SE가 남동, MPH가 miles per hour 라는 뜻이니까 남동풍이 시속 10~20마일로 분다는 소리다. 1마일이 1.6킬로미터니까 시속 16~32킬로미터다.

LOW @ 17K -5°F는 17000피트에서의 최저기온이 화씨 -5도라는 뜻이다.

매킨리시티에서 내려가는 사람들은 남은 물건을 썰매에 끌고 다니며 나누어 준다. 텐트 안에서 밖을 보니 썰매에 짐을 싣고 간다. 뛰어 나가 먹을 것을 가져오는데 이날은 약간의 간식과 연료를 조금 얻었다.

기다려요~ ( 6월 1일: 12일차 )

일기예보 판때기를 들여다보며 궁리를 거듭하다가 아예 판을 들고 레인저 사무실에 찾아가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혁이가 언제 정상 공격하는 게 가장 좋으냐고 물으니 자기들도 모르겠단다. 다시 대책회의를 열어 내일 5캠프로 올라가기로 했다.

이날도 텐트 문을 열어 놓고 썰매 장사가 지나기를 기다렸다. 썰매가 보이기에

“Wait a minute." (잠깐만 기다려요~) 소리치고 나가 이것저것 얻어 왔다. 세 번에 걸쳐 간식은 엄청 많이 가져왔는데 연료는 얻지 못했다. 염치 코치 없이 마구 가져오려니 거지 중에 상거지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상거지 인 것이 온 동네 소문났는지 한 여자가 한 보따리채 우리 텐트에 주고 간다. 기아팀의 이준영씨는 책까지 두 권 얻었다고 대장님에게 한 권 주었는데 나중에 어떤 여자가 다시 찾으러 왔다.

이 날은 구걸해온 쿠키에 땅콩버터를 발라 포식했다.

낮에도 낮잠, 밤에도 낮잠 ( 6월 2일: 13일차 )

서울서 떠날 때는 초파일이라 상현달인 오른쪽 반달이었는데 어느덧 왼쪽 반이 남은 하현달로 변했다. 오늘은 대원들이 하이캠프로 떠나는 날이다.

안전벨트와 피켈로 중무장하고 떠나는 대원들을 보려니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는 어미처럼 가슴이 찡하다. 고산에 원정 와서 떠나는 대원을 보면 저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마음이 불안 불안하다.

나는 체력도 딸리고 실력도 딸려 베이스캠프인 매킨리 씨티에 머물기로 했다. 속도가 한 없이 느린 내가 안자일렌을 하고 따라 가다가는 네 명 모두 오늘 안에 못 가게 생겼으니 도저히 따라 붙을 수가 없다.

대원들이 떠난 후 빈 텐트를 청소하고 짐을 정리하는데 갑자기 휑하니 찬바람이 부는 듯 썰렁하다. 기아팀의 이길하씨는 고소가 심해 못 가고 혁이는 베이스를 지키라는 박전무의 명령에 할 수 없이 머물렀다. 셋이서 쌍화차와 과자로 점심을 때웠다. 쌍화차를 내 텐트까지 배달해 주는 혁이의 마음씨가 고맙다. 나는 원래 무수리 과인데 룸서비스까지 받으려니 갑자기 왕비 과로 변신한 것 같다.

설벽에 매달린 대원들이 개미의 행렬처럼 작아지더니 드디어 구름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빈 텐트에 들어와 외손자 건희와 외손녀 송희에게 엽서를 썼다. 밖으로 나가니 외국 남자들 셋이서 부메랑을 던지며 놀고 있다. 대구 등산학교팀의 남자도 가더니 한바탕 같이 놀고 온다. 우리 쪽으로 던질 때 부메랑을 보니 플라스틱이 아니고 실로 짠 것이다. 어디서나 즐기며 여유를 갖는 이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텐트 안에 있는데 밖에서 혁이가

“설인이 나타났나?” 한다.

밖으로 나가니 웬 남자가 알몸에 검정 팬티만 입고 모자 쓰고 나타났다. 권총 하나만 차면 말 그대로 람보다. 그런데 권총이 없었기 망정이지 팬티에 권총 찾다가는 팬티까지 내려갈 뻔 했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데 소변구멍으로 가더니 척 내리고 당당하게 볼 일을 본다.

혁이는 저녁 준비를 하는지 우리 텐트 앞 임시 주방에서 물을 끓이며 앉아있다. 외국인이 지나가자 혁이가 저녁 먹었느냐고 묻는다. 아직 안 먹었다고 하며 네 친구들은 어디 갔느냐고 한다. 하이캠프에 갔다고 하니 너는 왜 안 갔느냐고 또 묻는다. 나는 쿡이라고 하니 프로 쿡 같이 보인다고 칭찬한다. 커피 한 잔 하겠느냐고 하니 벌써 먹었다고 한다. 한국 인삼차 줄까? 하니 달라고 하여 네 개를 주니 고맙다고 가져간다.

그런데 잠시 후 또 와서 인삼차 잘 먹었다고 김치는 없느냐고 묻는다. 없다고 하니 하이캠프에 다 가져 갔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그냥 간다. 한국 김치 좋은 건 어떻게 알았나 모르겠다.

조금 있으니 경기 연맹의 정대장님이 그냥 하산하고 뒤 이어 기아팀의 이수동씨도 내려왔다. 기아팀 두 명, 경기팀 한 명, 혁이와 나, 이렇게 다섯 명이 저녁을 먹고 자리에 누웠다.

문득 오늘이 지자제 선거가 있는 날이란 생각이 떠오른다. 한국은 3일이니까 벌써 결과가 나왔을 텐데 도의원으로 출마한 동생 남편이 어찌 됐을까 궁금해진다. 셋째 동생 재숙이 시어머니는 많이 아프셨는데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새벽 한 시 반이나 되어 화장실 갔다 오려니 옆의 텐트 사람들은 그때까지 밖에서 매트리스 깔고 술 마시며 얘기하고 있다. 내가 오니 손을 흔들며 아는 척 한다.

여기는 밤 12시가 넘어도 훤한 것이 도무지 밤이 없다. 그래서 호선생님은 낮에도 낮잠, 밤에도 낮잠 잔다고 한다. 백야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환한 줄은 몰랐다. 아무리 한 밤중이라도 별을 볼 수 없으니 공허하기까지 하다.

콩나물시루처럼 꼭꼭 배겨 자다가 혼자 자려니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맨바닥으로 굴러간다. 바닥이 차가와 잠이 깨면 매트리스 밖으로 나가 있다. 일어나 대장님 카고백과 경기 연맹 사람들이 맡긴 짐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점점 낮아지는 주방 벽 ( 6월 3일: 14일차 )

눈을 녹여 물을 만들려면 한 짐을 가져와도 한 그릇 밖에 안 된다. 주방장 혁이는 주방 벽을 야금야금 뜯어내 녹이고 있다. 우리 벽이 너무 낮아지자 철수한 텐트의 벽을 뜯어다가 녹이고 있다. 젊고 체력 좋은 사람이 밥이나 하고 있으니 얼마나 갑갑할까 미안하기만하다.

아침 식사 후 갑갑증이 났는지 갑자기 썰매를 들고 언덕으로 올라간다. 눈썰매를 타겠다는 것이다. 한참을 올라가더니 썰매에 배를 깔고 신나게 타고 내려온다. 중학교 졸업하고부터는 부모님 의지하지 않고 혼자 벌어서 학교 다니고 군대 갔다 와서 말레이시아 선교 갔다가 거기 머물렀다고 한다. 키나발루산 가이드 하며 돈 벌어서 한국식당도 하고, 호텔에 김치 납품도 하고, 의료 선교 다니며 학교도 지어줬단다. 우리 아들보다 5살이나 어린데 이토록 강인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들판의 야생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 대면 우리 아들은 온실 속의 화초 같다.

하이캠프인 C₅ 에 있는 16명은 오늘 휴식 한단다. 내일은 날씨가 더 안 좋아지니 오늘 정상 가라고 무전을 쳤지만 어제 너무 힘들었는지 그냥 쉬는 모양이다. 오후에는 텐트에 혼자 앉아 남편과 아들에게 또 엽서를 썼다. 텐트 위에 사르륵 사르륵 눈 내리는 소리는 매킨리의 숨결 같기도 하고 속삭임 같기도 하다.

기아의 이길하씨는 일주일째 거의 식사를 못했다고 하더니 오늘은 라면을 조금 먹는다. 밥 끓는 냄새만 맡아도 토한다고 한다. 꼭 입덧 하는 사람 같다. 그걸 보니 내가 처음 입덧 할 때 생각이 난다. 용산중학교 근무할 때 인데 옆에 앉은 미술 선생님과 내가 거의 비슷한 때에 임신 했다. 나는 입덧이 그리 심하지 않았는데 미술 선생님은 교무실에 앉았다가도 수시로 화장실에 가서 토했다. 남들이 입덧도 심하다고 하기에 나는

“그래도 입덧은 안 나네요.”

했더니 그게 입덧 나는 거지 뭐냐고 한다. 나는 입덧은 입이 덧나서 무슨 딱지가 생기는 건줄 알았다고 했더니 결혼한 여자가 입덧도 모르니 이건 해외토픽 감이라고 다들 박장대소했다.

이길하씨의 입덧이 계속 되는 관계로 저녁에는 우리 텐트에서 식사했다.

주부 우울증 걸릴 것 같아. ( 6월 4일: 15일차 )

오늘 아침에는 헌터봉도 포레이커봉도 흰 베일을 쓰고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는다. 우모복과 텐트슈즈, 장갑과 고소모까지 쓰고 누워도 뼈가 춥다. 아침마다 텐트에서 우수수 얼음이 쏟아진다. 볼펜도 얼어 글쓰기도 힘들다.

소변을 보고 오려니 이길하씨가 버너를 켜고 있다. 배 고파서 잠이 안 온단다. 이제 서서히 입덧이 끝나가나 보다. 텐트로 들어와 건빵과 수영씨가 준 육포, 배복순씨가 보내 준 사과 말린 것을 먹었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지원과 격려가 있었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외국 남자 한 명이 어제 등정하고 내려오다 우리 팀을 보았다고 한다. 어제는 날씨가 좋아 등정이 가능했나보다. 하이캠프에 있는 우리 팀은 날씨가 안 좋아 오늘도 정상 공격에 나서지 못했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공격이란 단어는 좀 어폐가 있다. 사람이 어찌 산을 공격할 수 있을까? 계란으로 바위치기 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냥 매킨리의 품에 잠시 안긴다는 말이 더 좋을 듯하다.

혁이가 주방에 앉아 있으니 레인저가 놀러 왔다.

“너희 친구들은 하이캠프에 있냐? 너는 쿡이냐?” 하며 말을 건다. 우리가 친구 기다리는 것은 온 동네 소문 다 났다. 혁이가 쿡인 것도 세계적으로 다 알려졌다. 레인저는 여기서 10일, 하이캠프에서 7일 있다가 내려간단다. 5명이 근무한다고 하여 인삼차 5개를 주며 건강에 좋다고 하니 섹스에도 좋으냐고 묻는다.

잠시 후 시베리아 할아버지가 놀러 왔다. 엘부르즈도 올라가고, 파미르 고원의 7000m 급 산에도 올라갔단다. 킬리만자로와 아쿵가구아에도 올라갔다고 은근히 자랑을 한다. 몇 살이냐고 물으니 63살이란다. 대단한 할아버지다.

혁이는 밥을 하다가 따분한지 주부 우울증 걸릴 것 같다고 한탄한다. 젊은 피가 끓는데 전업주부 노릇만 하고 있으려니 미칠 지경인가보다. 2주 째 씻지를 못하니 머리는 근질근질, 발가락도 간질간질, 온몸이 끕끕하다. 빈 텐트에서 혼자 생활하려니 독방에 갇힌 죄수가 된 기분이다. 9일째 이곳에서 머물려니 빨리 내려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튀어~ ( 6월 5일: 16일차 )

밤새 폭설이 내렸다. 텐트가 무너질까봐 스틱으로 안에서 밖으로 치고 밖에 나와 두드리며 잠도 못 자고 눈을 털었다. 하이캠프에 있는 사람들은 고립됐다고 연락이 왔다. 수시로 곳곳에서 눈사태 나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이 요란하다.

일기예보 판을 보니 오늘도 눈이 6인치 더 온다고 한다. 1인치는 2.54cm 니까 15cm가 더 온다는 소리다. 하이캠프의 기온은 화씨 -10도, 동풍이 35~45 MPH 다. 섭씨로 -23도 풍속은 시속 56~72 km라는 소리다. 영하 23도의 추위에서 자동차 문 열어놓고 시속 70km로 달릴 때의 추위다. 대원들이 걱정된다.

이길하씨는 고혈압 약을 3캠프에 두고 다른 약을 잘못 가져와 약이 다 떨어졌단다. 레인저 사무실에 가서 고혈압 약 없느냐고 물으니 없단다. 3캠프에 있는데 내려갈 수가 없다고 하니 너희들 책임이다. 자기들은 약 없다 소리만 되풀이 하며 가서 가져오란다. 이 소리를 듣자 혁이와 수동씨는 자기들이 갔다 오겠다고 나선다. 눈이 30cm는 쌓였는데 어떻게 갔다 올지 걱정이다.

눈이 멈추자 하이캠프에서는 전원이 하산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우리는 정상이고 뭐고 눈사태에 묻히지 말고 잘 내려오기만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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